예술의 전당 예프기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클 관람 후기
안녕하세요, 시크님들.
오늘은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의 피아노 리사이틀 관람하고 온 후기 소개할게요.
🎹 관람한 공연 미리 보기
14살, 예술 잡지에서 만난 소련의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을 만났습니다. 당시에는 소련의 피아니스트를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카세트 테이프로만 그의 피아노 연주를 접했어요. 카세트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그의 냉철하면서도 예술적인 피아니즘에 빠져 들었죠. 저의 롤모델이 탄생한 순간입니다.
2024년 11월 20일,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다녀왔어요.
저도 어느덧 나이를 먹어 옛 팬이 되어가는데요, 그는 여전히 순수하더군요. 그레이가 섞인 에메랄드빛 맑은 눈을 반짝이며, 경쾌하고 겸손한 발걸음으로, 어떠한 제지도 없이 그의 팬들을 맞이했어요. 도도하지도, 잘난 척을 하지도 않는 그의 모습을 여전히 경외합니다.
예르게니 키신 리사이틀 1부 관람 후기
1부는 베토벤과 쇼팽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는 제가 너무 사랑해 마지 않는, 베토벤 소나타의 중기에서 후기로 흘러가는 시절의 감성적인 마이너의 멜로디와 화성이 일품인 그런 작품입니다. 음대에서는 연주곡으로는 좋지만, 시험 곡으로는 '별로'라는 인식으로 안타깝게도 인기가 있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키신은 이번 연주에 이 작품을 첫 곡으로 두고 리사이틀의 실마리를 풀어갔어요.
적절한 감성과 테크닉 밸런스를 기대했었는데 기대는 처참히 무너져 내렸죠. 순식간에 그의 음악에 아니, 그가 준비한 소리에 빠져들었습니다.
로맨틱하며 선율과 화성의 패턴을 철저하게 구분 짓는 것이 아니었어요.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다이내믹에 신경을 쓰며 점진적인 디벨롭이 이루어졌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은 그렇게 리사이틀의 첫 번째 곡으로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몇 번의 박수갈채를 받은 키신은 앉은 자리에서 무겁게, 너무나도 예술적으로 쇼팽의 녹턴 Op. 48-2를 연주했습니다. 그는 쇼팽의 녹턴 또한 아름다운 소리로만 정의하여 연주한 건 아니었어요. 얼마나 수많은 녹턴을 연주하였던가. 인고의 시간을 기다리며, 녹턴이 주는 슬픔을 나타내며 다음 작품인 쇼팽의 환상곡 Op. 49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쇼팽의 환상곡은 기술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지만, 여러 개의 다양한 패턴과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여러 음의 향연으로 인해서 듣기에 어려울 수도 있는 작품인데요. 하지만 키신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7번을 스타트로 끊음으로서 쇼팽 환상곡이 어떤 분위기로 갈 것인지, 오늘의 무대가 어떠할 것인지 예상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뮤지컬 맵을 선사해 주었어요.
묵묵하게, 너무나도 진중하게, 성실한 그의 음악은 너무 과하지도 너무 비어 있지도 않은 소리의 밸런스로 '중용'을 지키며 표현한 것 같아요. 그가 나타내고자 한 환상은 너무나도 슬프고 절망적으로 느껴졌어요. 어른이 되고서 알게 된 다양하고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과 이야기를 정갈하게 설명해 주는 듯했습니다.
예르게니 키신 리사이틀 2부 관람 후기
인터미션이 끝나고 좀 더 적극적으로 키신의 음악은 자신의 예술과 음악에 대한 철학을 보여주기 시작했습니다.
브람스 네 개의 발라드.
브람스도 늘 누군가와 투쟁하며 자신의 음악을 지키던 사람이라서 그랬을까요. 키신이 들려주는 브람스의 발라드는 처참하고 숭고하게 느껴졌습니다. 처참하고 숭고한 음악 사이사이에 들려주는 예쁘고 샤이니한 소리는 그가 소망하는 것들을 보여주었고 그러다가도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불협화음은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요. 그는 오늘 연주의 대미를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2번으로 장식했습니다. 더욱 슬픈 역사의 그 순간을 함께한 프로코피예프의 복합적이면서도 단순한 패턴이 주는 경이로운 경쾌함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의 모순을 자아내주고 있었습니다.
그 유명한 2번 4악장은 경쾌하고 무겁지 않았습니다. 저음에서 테크니컬하게 갈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예술로 승화되어 표현되는 프로코피예프가 있었습니다. 그는 건반 위의 구도자로서, 자신의 노년을 더욱 음악적 철학가로서 다져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느릿한 걸음으로 피아노 앞에 다가서는 그는, 이제는 단순히 천재 피아니스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더욱 겸손하고 숭고한 모습으로 피아노에 앉은 그는, 그 이상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건반 위의 구도자로서 나타나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멋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저의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어요. 저는 그저 철부지 어린애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주회 오오티디
디올에서 여성스럽고 저에게 잘 어울려서 품은 리얼 밍크 퍼를 입고 나왔어요.
디올 레더 북토트로 산뜻함을 함께 나타내주었고 루부탱의 블랙 힐을 포인트로 신었어요.
고급스러움의 대명사, 벨벳 원피스!
가을이 무르익어가면서 공기의 건조함이 피부에 날카롭게 스쳐 갑니다. 이제 겨울이네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키신의 다음 레퍼토리와 연주가 벌써 기다려집니다.